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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문화가산책] 스토리텔링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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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8일

고등학생 아들놈 성적표를 보았다가 희한한 일을 경험했다. 내가 보기엔 괜찮은 등수인데도 아내도 아들놈도 영 표정이 개운치 않아 보였다. 등수에서 1등 차이로 등급이 바뀔 수 있고 그 결과가 대학 진학을 좌지우지한다는 설명이 따랐다. 무슨 시험이 그래? 나 때는 남들보다 1.5 정도의 재능만 보여도 성공할 수 있었는데. 분명 밖으로 내뱉었는데도 혼잣말이 되어 웅얼거리고 말았다.

우리가 사는 오늘은 남보다 조금 나은 능력으론 명함도 못 내미는 세상이다. 모든 게 일반화되고 평준화가 이루어진 결과다. 질기고 튼튼하고 오래가는 건 기본이고, 물리적 만족을 넘어 감동을 주어야 경쟁력이 된다. 감동은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가능할 터. 적게는 천명에서 많게는 만명에 이르는 사람들과 소통하려면 스토리를 제대로 만들어야 걸음마라도 뗄 수 있는 거다.

공자의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건 이야기가 있어서다. 제자의 물음에 답한 공자의 대답이 스토리텔링으로 위력을 발휘한 탓이다. 사랑의 정신에 기초한 예수의 가르침이 전 세계인에게 전파된 것도 같은 이치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제자들과 그리스도의 역사가 성경책을 통해 읽혀지면서부터다. 제주도의 올레길이 관광명소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곳곳마다 이야기가 있어서다. 소통을 위한 도구로 스토리텔링이 최고의 효과를 발휘해 가능해진 일이다.

과거의 소통은 오늘날처럼 쉽지 않았다. 일단은 소통에 걸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무제한 무차별적이다. 시간이나 공간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다. 30년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만큼 힘 있고, 낯모르는 이에게 공중화장실로 휴지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할 만큼 세세하기 이를 데 없다. 개인 블로거,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통해 즉각적으로 전파되고 알려질 수 있다. 저축처럼 필요하면 끄집어내어 쓰고 추가하고 삭제할 수도 있다.

나는 길을 걸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도시에서 살고 싶다. 거리를 걷다 보면 아름다운 상념이 떠오르고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도시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사람의 향기가 느껴지고 인품이 보이는 극장 같은 도시, 광장 같은 도시에 살고 싶다.

봄을 맞은 대구 도심의 거리는 봄이 왔지만 봄이 만져지지 않는다. 새 단장을 해야 할 거리가 온통 똑같은 문구를 적은 현수막으로 삭막한 바람을 맞고 있다. '영남권신공항은 밀양이 적지'라는 문구도 있고 '바다 길은... 하늘 길은 밀양으로...'라는 문구도 있다. 지난 선거 때를 방불케 하는 현수막 홍수다.

공연기획자는 현수막과 친하다. 대중에게 싸고 널리 알리는 데 현수막만 한 홍보수단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수막이 영업으로 바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차선의 선택이라고 여긴다. 자기만족이나 자기위안으로는 이만 한 게 없어서다. 장사가 되건 말건 거리에 나부끼는 현수막을 보면 용기가 생긴다. 집단에 대한 소통으로는 괜찮다고 자위하게 된다.

공연기획자와는 달리 일반 사람들이 현수막을 내거는 목표는 단순하다. 알리기 위해서란다. 집단의 힘을 과시하려는 뜻도 있을 수 있겠지만 소통이 먼저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밀양이 최적지'라는 결론을 불쑥 내밀기보다는 당위성을 이야기하는 걸로 소통의 처음을 삼아야 한다. 이곳저곳 현수막을 마구마구 내거는 것에 앞서 스토리부터 시민에게 제공해야 옳은 처사다. 가뜩이나 대구는 공연문화중심도시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포부가 있다. 밀양이 영남권신공항이어야 한다는 스토리텔링 하나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는 대구시가 과연? 스토리는 감동을 낳고 감동은 시민의 결집력을 가져올 텐데. 아직도 떼쓰기에 몰입하는 대구경북이 안타깝기만 하다. 스토리만 있으면 SNS(Social Networking Service)와 같은 도구가 다 알아서 해주는데



한상덕(대경대 연극영화방송학부 교수)